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트 불교 (문단 편집) === 족첸, 마하무드라, 중관에서의 "마음의 본성" === >무엇이 일심(一心)인가? 이르길 염오와 청정의 모든 법(法)이 그 성(性)이 둘이 아니고 진실과 허망의 두 문(門)이 다름이 있을 수 없기에 일(一)이라고 이름하고, 이 둘이 아닌 자리가 모든 법 가운데 실(實)로서 허공과 같지 않아 성(性)이 스스로 신묘하게 알기에 심(心)이라고 이름한다.(何爲一心 謂染淨諸法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 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 >----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 >제법이 모두 공한 곳에 신령한 앎이 어둡지 않으니 즉 이러한 공적영지의 마음이 그대의 본래면목이다.(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원효]]는《대승기신론별기》를 통해 대승의 양대 사상인 중관과 유식을 여래장으로 융합한 일심(一心) 사상을 주창하였고,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에 갖춰진 본래적 각성(本覺)에 관하여 '마음의 본성이 스스로 신묘하게 앎(性自神解)'이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지눌]]은 《수심결》에서 '공하고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러운 앎(空寂靈知)'이 있으니 이것이 곧 '본래면목'이고 마음의 본성이라고 일컬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역시 궁극적 깨달음은 마음의 본성/특성/자성(自性)/법성(法性)을 앎으로써 가능하고, 마음의 본성은 곧 '공성과 본연의 지혜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한국과 티베트 모두 스승과 제자 간의 심전(心傳)으로 마음의 본성에 관한 가르침이 전해져왔으나, 차이가 있다면 중관 사상이 발달한 티베트에서는 마음의 공(空)한 본질에 대한 논의가 보다 심도있게 이루어져왔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도 그간 미약했던 중관적 시각이 강화된다면 동아시아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일심', '불성', '진여', '본각', '공적영지심' 등을 실체화하여 집착하는 위험을 감소시켜 더욱 균형잡힌 교학적, 수행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족첸, 마하무드라, 중관에서의 마음의 본성에 대한 닝마, 까규 스승들의 설명이다. 족첸, 마하무드라 전승은 인도-티베트 불교의 금강승 전승이면서 동시에 현교의 중관 사상과 밀접하게 연계되었고, 선(禪)과의 유사성도 발견되는 독특한 수행 전통이다. 이를 통해 인도-티베트 불교와 동아시아 불교 간 사상적 교섭의 단초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에서 벗어난 자유에 관한 족빠 첸뽀(Dzogpa Chenpo)의 견해는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와 대부분 일치한다. 그러나 주요한 차이점은 중관의 기본 견해가 허공과 같은 공(空)한 측면에 관한 것이라면, 족빠 첸뽀의 기본 견해는 언설(言說)로 표현 불가능하고 간단(間斷)없으며, 본초(本初)적으로 청정하고 벌거벗은 본연의 앎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족빠 첸뽀에 따르면, 본연의 앎과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은 허공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모든 극단을 벗어나 있다. >---- >롱첸 랍잠(Longchen Rabjam) >[[https://g.co/kgs/ubqLDm|Longchen Rabjam, 《A Treasure Trove of Scriptural Transmission: A Commentary on The Precious Treasury of the Basic Space of Phenomena》]] > >《최잉 쬐(Chöying Dzöd)》와 다른 족빠 첸뽀 문헌들은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를 찬탄한다. 그래서 부정대상 제한(dgag bay's mtshams 'dzin)의 정의에 관하여 족빠 첸뽀와 귀류논증 중관은 서로 일치한다. >---- >제3대 도둡첸(Dodrupchen) >[[https://g.co/kgs/hHrquN|Longchen Rabjam, 《The Precious Treasury of Philosophical Systems: A Treatise Elucidating the Meaning of the Entire Range of Spiritual Approaches》]] >다시 말해, 마하무드라는 무주(無住, apratiṣṭhita)의 견해, 그리고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수행과 연관이 있다. 이는 개념적으로 만들어진 극단을 멀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부분들에 의해 가립(假立)된 법(法)들의 자성(自性) 같은 개념으로부터 끊임없이 주의를 물러나게 함으로써 극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이러한 비개념성의 극치에 다다른 상태는 진정한 마음의 본성에 대한 대락(大樂)의 마하무드라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고, 이는 부작의(不作意, amanasikāra)의 밀교적 의미인 "광명(光明)의 자관정(自灌頂)"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과(果)로서의 대락(大樂)은 또한 오직 그러한 대락의 공성(空性)을 깨달을 때만 안정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집착의 대상으로 구체화되어 고통의 원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마하무드라와 중관의 융합은 싯다(siddha)들의 새로운 가르침들과 수행들을 주류(mainstream) 불교로 통합시키는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정의 세 번째 순간을 올바로 확인하는 것에 대한 마이뜨리빠(Maitrīpa)[* 인도의 학자이자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로 마하무드라 전승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의 스승으로 샤와리빠, 나로빠, 라뜨나까라샨띠 등이 있고 제자로는 아티샤, 마르빠, 큥뽀 낼죠르 등이 있다.]의 해석은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알아차림(즉, 부동불인(不動佛印, Akṣobhya seal) 또는 유가행의 공성) 뿐 아니라 그러한 알아차림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동시적(同時的)인 확인(즉, 금강살타인(金剛薩陀印, Vajrasattva seal) 또는 중관의 공성)까지 포괄한다. 마이뜨리빠는 만약 유가행(유식)의 일시적인 깨달음들이 중관에 의해 더욱 정제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유가행의 교리가 시설(施說)된다면, 그러한 유가행 교리들은 (중관에 도달하는) 필수적인 단계적 접근이 되고 유용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세번째 대락(大樂)은 성불(成佛)의 목표를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한 대락은 비이원성(非二元性)인 부동불인(不動佛印) 뿐만 아니라 비이원적인 대락 또한 그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금강살타인(金剛薩陀印)으로도 인(印)쳐져야 한다. >---- >[[https://g.co/kgs/qvEwmS|Klaus-Dieter Mathes, 《Maitripa: India's Yogi of Nondual Bliss》]] >중관은 "개념들을 초월하는 것" 4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비존재하는 것도, 존재하면서 동시에 비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도 않고 비존재하지도 않는 것도 아닌 무언가이다. 이러한 4가지 가능성 외에 무엇이 있는가? 없다. 비록 지적인 방식으로만 접근해보았지만, 이는 중관의 궁극적인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분석적인 방법으로써, 이러한 결론은 족첸에서도 옳은 결론이다. 나가르주나의 추론은 수승하다. >---- >최걀 남카이 노르부(Chögyal Namkhai Norbu) >[[https://g.co/kgs/JybVCn|Chögyal Namkhai Norbu, 《Dzogchen Teachings》]] >닝마는 자공(自空, rang stong)도 타공(他空, gzhan stong)도 아닌 숭죽, 즉 쌍입(雙入, Skt. yuganaddha, Tib. zung 'jug)의 견해를 따른다. 쌍입의 견해란 현상과 공성의 불가분성(현공불이顯空不二), 밝음과 공성의 불가분성(명공불이明空不二), 대락(大樂)과 공성의 불가분성(낙공불이樂空不二), 지혜와 공성의 불가분성(각공불이覺空不二) 등을 의미한다. [...] 중관논사들은 귀류논증을 완벽한 자공(自空)의 견해라고 여긴다. 족첸 텍최(trekcho)[* 족첸 수행 중 카닥과 관련된 수행을 '잘라 내기'라는 뜻의 텍최(khregs chod), 훈둡과 관련된 수행을 '직접적인 접근'이란 뜻의 퇴갈(thod rgal)이라 한다.]의 카닥에 관한 견해와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는 같다. 두 견해에서 모두 공성은 같은 개념이며 차이가 없다. (본초청정(카닥)은 귀류논증 중관의 공성을 가리키는 족첸의 용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롱첸빠(Longchenpa), 직메 링빠(Jigme Lingpa), 미팜(Mipham) 등 과거 닝마 스승들은 귀류논증 중관논사들이었다. 미팜 린뽀체에 따르면 귀류논증 중관의 공성과 족첸의 공성은 완벽히 일치한다. 차이란 없다. 100% 같다. >---- >켄첸 릭진 도제(Khenchen Rigdzin Dorje) [[https://www.byomakusuma.org/InterviewWithKhenchenRigdzinDorjeOnThe%20NyingmapaView.html|#]] 밀교에는 족첸(dzog chen)이나 마하무드라(mahamudra)와 같이 마음을 조작하지 않고 바로 직지심체(直指心體)하여 본성에 안주하는 명상이 있다. 족첸이나 마하무드라에서는 마음 그 자체가 마음의 본성과 하나되어[* 족첸에서는 마음을 일반적인 마음인 셈(sems)과, 공성과 순수한 앎이 결합된 마음의 본성인 셈니(sems nyid)로 구분한다. 셈은 분별하는, 이원적(二元的) 마음이며, 이와 달리 셈니는 분별을 여읜, 비이원적(非二元的)인 마음이다.] 그 상태에 머물게 된다. 족첸에서 말하는 릭빠(rig pa)나 무상요가 딴뜨라에서 말하는 정광명(淨光明, ‘od gsal) 등은 모두 마음의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마음의 본성은 모든 분별을 여의고 오로지 순수한 앎 뿐인 명료함을 특성으로 갖고 있다. '마음의 본성'이란 표현 때문에 마치 자성(自性)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마음의 본성' 혹은 '마음의 법성(法性)', '가장 미세하고 청정한 의식', '불성(佛性)' 또한 본질은 공(空)이며, 따라서 릭빠나 정광명을 증득한다는 것은 '주체(혹은 마음/의식)의 무자성(無自性)=주체의 공(空)함'을 온전히 깨닫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족첸, 마하무드라의 견해에 따르면, 마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공하면서 현상적으로는 명료한 앎을 드러내기 때문에 공성과 명료한 앎은 분리할 수 없다. 공성만을 강조하고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허무주의, 단멸론(斷滅論)에 해당하며, 반대로 현상의 본질을 '영원한 자아', '영혼(anima)', '아트만(Ātman)', '참나(眞我, True Self)'처럼 독립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영원주의, 상주론(常住論)에 해당한다. 따라서 족첸, 마하무드라 전승에서 진정한 마음의 본성은 극단을 배제한 공성과 현상의 불가분(不可分) 혹은 쌍입(雙入)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의(作意)를 여읜 것이 대수인(마하무드라)이요'' >''양변(兩邊)을 여읜 것이 위대한 중도(중관),'' >''이를 모두 포함하면 대원만(족첸)이라 하니'' >''하나를 앎으로써 일체를 깨닫는 확고함을 얻게 하소서.'' >---- >제3대 까르마빠 랑중 도제, 《마하무드라 발원문》(까규 대기원법회 번역팀 譯) > >랑중 도제는 이 발원문을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가르치기 위해 지었다: 본성의 완벽한 깨달음은 "모든 작의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이 바로 마하무드라(위대한 수인)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또한 그것은 중도(중관)란 다른 이름도 있다. 왜냐면 모든 극단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깨달음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것은 또한 대원만(족첸)이라 일컬어진다. 우리는 하나의 진정한 본성을 앎으로써 모든 법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 >제8대 타이 시투빠(ta'i si tu pa) >[[https://g.co/kgs/XjwUWX|Peter Alan Roberts, 《Mahamudra and Related Instructions: Core Teachings of the Kagyu Schools》]] > >(발원문의) 네 번째 줄은 비록 "세 가지 위대함"이란 다른 이름들이 있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오직 깨달음의 다양한 측면들을 묘사하기 위해 쓰여진다는 것을 일러준다. 용어들은 깨달음을 묘사하면서 단지 그렇게 묘사된 것 외에 더 깨달을 것은 없음을 알려주고자 한다. > >고귀한 랑중 도제는 어떤 사람들이 (깨달음의) 한 측면을 다른 측면보다 더 심오하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수행자들은 마하무드라가 족첸보다 수승하다고 여겼고, 반면 어떤 수행자들은 중관이 더욱 심오하다고 주장했다. 과(果)의 측면에서 모든 수행은 동일하다. 차이점은 오직 세속적인 이해를 통해서만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러나 지적(知的)인 서술로는 결코 궁극적인 본성을 묘사할 수 없다. 마하무드라, 중관, 족첸-이 세 가지 용어들은 모두 동의어이다. 도(道)의 측면에서도 또한 차이는 없다. 그러나 수행자들의 다양한 성향과 각기 다른 능력 및 요구로 인해 도의 적용에 있어 차이들이 생겨날 뿐이다. >---- >제3대 잠곤 꽁뚤(ʽjam mgon kong sprul) [[http://www.dharmadownload.net/pages/english/Natsok/0010_Teaching_English/Teaching_English_0034.htm|Jamgon Kongtrul Rinpoche the Third, 《Instructions on The Aspiration Prayer for Mahamudra》]] >중관은 위대한 승리자 붓다 샤캬무니가 설한 가르침의 정수를 드러낸다. 금강승의 수행들조차 중관의 견해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본존 수행을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본성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쉬는 진실삼매(眞實三昧, tattva-samadhi)에 머문다. 이 진정한 본성에 관한 명상은 중관의 명상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또한 족첸 명상으로 알려져 있다. 족첸의 가르침들은 사실 중관의 가르침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금강승의 수행일지라도 본존을 관(觀)할 때 우리는 중관의 지견(智見)을 갖고 있어야 한다. "모든 상(相)들을 초월한 원만차제(圓滿次第)"로 알려진 원만차제에 도달할 때, 우리는 또한 중관에 관한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족첸 명상과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본성의 공(空)한 측면은 중관을 수행하든 족첸을 수행하든 다르지 않다. 둘 모두 "관(觀)하는 상태", 혹은 작의(作意)를 여읜, 진정한 본성에 대한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알아차림의 명상을 수반한다. > >만약 이러한 설명이 참이라면, 중관과 족첸이 수행자들에게 진정한 본성을 알려주는 방식의 실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족첸은 논리나 추론을 사용하지 않고 진정한 본성에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족첸은 수행자 자신의 알아차림을 수행자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단순한 방법이며, 이를 통해 수행자 내면의 본성을 발견하도록 인도한다. 이와 달리 중관은 공성, 또는 진정한 본성을 논리와 추론이란 수단을 통해 알려준다. 중관은 진정한 마음의 본성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확립하는 보다 분석적이고 교학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차이는 기술적인 차이이다. 하지만 실제 본성에 관해서는 동일하다-분리된 두 가지 본성들 같은 것은 없다-우리가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수행 방식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당신은 물론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단지 이러한 가르침들이 모든 수행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한지를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 >---- >켄첸 빨덴 셰랍(Khenchen Palden Sherab) >[[https://books.google.co.kr/books?id=nC2ptgAACAAJ&dq=Opening+the+Wisdom+Door+of+the+Madhyamaka+School&hl=ko&sa=X&redir_esc=y|Khenchen Palden Sherab, 《Opening the Wisdom Door of the Madhyamaka School》]] >족첸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나가르주나(Nagarjuna)의 추론에 의지해야 하며, 마하무드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티벳의 셰드라(티베트 불교 강원)에서는 《중론》과 짠드라끼르띠(Candrakīrti)의 《입중론》 그리고 다른 비슷한 문헌들을 여러 해 동안 공부한다. > >그러나 마하무드라와 족첸은 따로 배우지 않는데, 왜냐하면 중관 텍스트들이야말로 서로 다른 주장들과 논리적 추론들의 광대한 집합체로서, 그것들을 미묘하고도 심오한 방식으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마하무드라 전승에서도 역시 제3대 까르마빠 랑중 도제(Karmapa Rangjung Dorje)의《마하무드라 발원문》과 같은 다음의 문장들을 찾을 수 있다. > >"마음에 관해 말하자면, 마음이란 것은 없다! 마음의 자성은 공하다." > >만약 4구부정 등의 추론을 통해 분석한 결과 마음의 자성이 공함을 확신하게 된다면, 마하무드라에 대한 이해는 심오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구절을 암송할 수야 있겠지만 마음 속으로는 일종의 의견이나 추측 정도로만 여기게 된다. > >만일 《중론》의 추론들을 익힌다면, 마하무드라와 족첸의 공성과 무자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때 이미 익숙한 것들이라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 >미팜 린뽀체는 《결정보등(決定寶燈, nges shes sgron me)》[* 국내에는 [[https://naver.me/G8mF1bn5|《정해보등론 강의》]]란 번역서가 있다. 미팜 린뽀체의 저작을 [[오명불학원]]의 직메 푼촉 린뽀체가 전수, 소다지 켄뽀가 강설 및 한역(漢譯)한 중국어본을 지엄스님이 한국어로 번역했다.]이란 간략한 문헌을 지었는데, 그는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닥(ka dag, 本初淸淨)[* 족첸의 존재론(gzhi, 根)에서 마음의 본성은 본질(ngo bo)인 카닥(ka dag, 本初淸淨), 특성(rang bzhin)인 훈둡(lhun sgrub, 任運自成), 그리고 발현인 툭제(thugs rje, 大悲周遍)로 구성된다. 카닥은 공성, 훈둡은 현상을 가리키며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툭제는 대자비로 중생의 희구(希求)에 응하여 윤회와 열반 등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현상들로 나타나는 에너지를 뜻한다. 족첸에서는 마음의 본성을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의 비유에서 카닥은 '자기 자신'이라고 지칭할만한 실체가 없이 비어 있어 어떤 상(象)이든 비출 수 있는 거울의 본질, 훈둡은 저절로 끊임없이 상들을 비추는 거울의 특성, 툭제는 거울에 비춰진 무수히 많은 특정한 상들에 해당한다.] 에 대한 완벽한 확신을 얻으려면 반드시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를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 > >카닥 혹은 본연의 본초청정은 족첸의 견해로서, 그 견해를 완벽하게 얻기 위해선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를 완벽히 얻어야 한다. 이는 족첸의 카닥 견해와 짠드라끼르띠의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 >켄뽀 출팀 걈초(Khenpo Tsultrim Gyamtso) >[[https://g.co/kgs/4aHmmH|Khenpo Tsultrim Gyamtso, 《The Sun of Wisdom: Teachings on the Noble Nagarjuna's Fundamental Wisdom of the Middle Way》]] 족첸, 마하무드라와 귀류논증 중관은 현상과 공성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각 전승의 견해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조화와 일치를 이룬다. 족첸, 마하무드라와 귀류논증 중관 모두 단변(斷邊)과 상변(常邊)의 양 극단을 여읜 중도로서 자성이 없는 공을 설하고 있다. 족첸, 마하무드라의 공성과 귀류논증 중관의 공성은 일치하며, 귀류논증 중관적 접근은 족첸, 마하무드라의 견해를 이해하는 교학적, 수행적 토대[* 중관의 분석은 교학의 가르침대로 연기와 공성을 관(觀)할 수 있고, 단견과 상견 등 잘못된 견해에 치우치거나 무기(無記), 혼침(昏沈)에 빠지는 위험이 적은 장점이 있다. 그러나 족첸, 마하무드라 전승의 관점에서 중관의 분석은 마음의 미세한 분별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 마음의 본성을 아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렇듯 티베트 불교 안에는 철학적 분석에 의존하거나 직접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전자를 '학자'라는 뜻을 가진 빤디뜨(pandit)의 전통, 후자를 '거지''라는 뜻을 가진 꾸살리(kusali)의 전통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거지'는 곧 사원 바깥의 저잣거리, 숲, 화장터, 강가 등에서 은밀히 밀교 수행을 하던 요기, 요기니들을 일컫는 말이다.]가 된다. 특히 무상요가 딴뜨라, 족첸, 마하무드라 등에서 말하는 공성은 현교의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 정의한 공성에 해당하며 유식학파나 자립논증 중관학파에서 정의하는 공성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 4대 종파는 모두 중관을 중시하며 그 중 닝마, 까규는 특히 중관과 유식의 결합을 강조하는 편이지만 이들 종파는 한편으로 외경(外境)의 부정, 자증(自證)의 인정[* 족첸에서도 자기인식을 중시하지만 유식에서의 자증과는 차이가 있다. 롱첸빠의 설명에 따르면, 유식의 자증(rang gi rig pa)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상대적이고 왜곡된 인식이지만, 족첸에서의 자기인식(so so rang gi rig pa)은 언설, 사유를 초월한 궁극적 인식이며 주체와 객체가 다르지 않다.] 등을 주장하는 유식학파의 견해를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닝마나 까규 스승들 중에는 금강승의 견해를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교의(敎義) 위계에서 귀류논증 중관학파보다 하위학파에 해당하는 유식학파나 자립논증 중관학파에서 정의한 공성을 족첸, 마하무드라의 공성과 동일하다고 보는 경우는 없다.[* 단, 겔룩 외의 종파에서는 겔룩에 비해 자립논증 중관학파와 귀류논증 중관학파 간의 차이를 더욱 적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승의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인 승의제의 증득(證得)에 있어서는 두 학파 간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https://en.m.wikipedia.org/wiki/Svatantrika%E2%80%93Prasa%E1%B9%85gika_distinction#|Wikipedia, 《Svatantrika–Prasaṅgika distinction》]]] 닝마, 까규 논사들은 중관과 족첸, 마하무드라가 각기 분석과 직관이란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개념적 극단을 여읜 결과의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이미 상술하였듯이 "미세의식", "청정의식", "마음의 본성", "비이원적인 알아차림", "광명", "대락"과 같은 밀교 용어와 표현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마치 아뜨만이나 "참나"와 같은 고정불변한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독(誤讀)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같거나 유사한 용어라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공(空)"이라는 용어도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 * 초기불교: 1)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같은 명상 상태의 일종. 2) 무아(無我). * 아비달마: 1) 빈 공간이나 틈이 되는 유위(有爲)의 공계(空界). 2) 공간적 점유성(접촉)과 장애성(막힘)이 없는 무위(無爲)의 허공. * 유식: 유식에서는 법공(법무아)을 확립하는 두 가지 논리가 있다.[* 인공(인무아)의 의미는 자립논증 중관학파 이하의 모든 학파들이 동일하다. 즉 귀류논증 중관학파를 제외하고 다른 불교학파들의 인무아에 대한 정의는 같다.] 1) 인식 주체(能取)와 인식 대상(所取)의 본질이 모두 마음이라는 능소이공(能所二空).[* 이공(二空)은 다시 말해 마음 외에 별도로 존재하는 외계 대상, 즉 외경(外境)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능취와 소취 모두 마음의 현현이며, 서로 다른 실체로는 공하다(능취와 소취가 서로 다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2) 의타기성(依他起性)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공(空)한 것.[* 유식에서 제법(諸法)을 분류하는 체계인 삼성설(三性說)에서, 분별지(分別智)의 인식대상이며 명칭과 표식/기호를 적용하는 토대가 되는 변계소집성은 공하지만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공하지 않다. 유식에서는 의타기성(=연기)이 변계소집성의 측면에서 공한 것을 가리켜 원성실성(=공성)이라고 정의한다. 즉, '부정대상인 변계소집성의 부정(변계소집성이 자성으로 공한 것)'이 '원성실성≡공성≡진여≡법성'이 되며, 유식은 이러한 공성을 자성이 있는 실재로 인정한다.] * 여래장: 번뇌에 물들지 않음. * 중관: 일체법이 연기(緣起)하므로 고정불변한 실체(자성)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자성(無自性). 특히 공(空)을 '텅 빈 자리', '형상 없음' 등으로 단순하고 안일하게 해석할 경우 유변(有邊)이나 무변(無邊)의 극단에 치우치기 쉽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공성을 알지 못하여 유변에 치우친 대표적인 사례로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을 언급한다. * 아상(我相, ātmasaṁjñā)=아뜨만(Atman)이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 중생상/유정상(衆生相/有情相, sattvasaṁjñā)=사트바(Sattva)가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아비달마나 힌두철학 문헌에서 '사트바(sattva)'가 '의식의 순수성' 내지 '순수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므로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중생(衆生)'이란 용어를 선택한 구마라집의 한역이 오역이란 주장도 있으나,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중생상/유정상(衆生想/有情想, sattva-saṃjñā)'의 용례를 살펴보면, 구마라집의 번역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적확한 번역임을 알 수 있다.[br]예를 들어 《대비바사론》에서는 지식념(止息念, ānāpāna-smṛti)이 법상(法想, dharma-saṃjñā)을 강화하고 공관(空觀)의 근본이 되어 4념주(四念住, catuḥ-smṛtyupasthāna)를 유도하지만, 부정관(不淨觀, aśubhā)은 유정상(有情想, sattva-saṃjñā)을 강화하여 공관을 장애하고 신속히 4념주를 유도할 수 없다고 말한다.[br]"이로 인하여 여러 경에서는 지식념은 4념주에 통한다고 말씀하셨으나 부정관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 또 지식념은 법상(法想, dharma-saṃjñā)을 더욱 늘리고 공관(空觀)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빨리 4념주를 이끌 수 있으므로 이것만 말씀하셨다. 부정관과 같은 것은 유정(有情)이란 생각(sattva-saṃjñā)을 더하면서 “이 뼈는 여인의 것인가, 남자의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공관을 장애하고 빨리 4념주를 이끌 수 없으므로 말씀하지 않았다(송성수 譯)."[br]여기서 유정상은 생명체로서의 자아가 실재한다는 인식을 의미하며, 법상은 생명체에 대비되는 풍대(風大)라는 물질을 관찰함으로써 공관(空觀)에 이르는 토대가 되는 인식이다. 즉 유정(sattva)은 순수의식 따위가 아닌 여성, 남성 등 생명체, 개체(individual)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초기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구마라집 한역본인 《유마힐소설경》에서도 《대비바사론》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중생상, 법상이란 용어가 적용된다.[br]“병든 보살은 반드시 이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妄想), 전도(顚倒), 여러 가지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지 (나의 몸에는 병을 앓을 만한) 실체로서의 존재(實法)는 없다는데, 어떻게 병이 걸렸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 몸은 4대(四大)가 결합한 것이므로 몸이라고 임시로 이름(假名)하였을 뿐이지, 이 4대에 주인(主, adhipati)은 없고, 또한 몸에는 나(我, atman)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생기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같이 병의 근본을 알았으니, 곧 나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我想)도, 중생이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衆生想)도 없애 버리고, 물질이라는 생각(法想, dharma-samjna)을 일으켜야겠구나.’(동국대 역경원 譯)"[br]여기서 아상(我想)은 4대로 구성된 몸과 별도로 존재하며 몸을 주재(主宰)하는 아트만이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중생상(衆生想)은 몸이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법상(法想)은 몸이 수많은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법상은 아상, 중생상에 비해 더욱 세밀한 분석을 거친 인식으로 공관(空觀)의 토대가 되지만, (인식대상인 물질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법상 또한 그릇된 집착이므로 아(我)와 아소(我所)를 떠나야 한다고 《유마힐소설경》은 설한다.] * 인상(人相, pudgalasaṁjñā)=뿌드갈라(Pudgala)가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 수자상/명자상(壽者相/命者相, jīvasaṁjñā)=지바(Jiva)가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이들은 형이상학적 관념들로서 대부분 물질적 형상이 없지만, 불교의 공(空) 사상에서 배격하는 극단적 견해인 상견(常見)에 해당한다.[* 《금강경》의 산스끄리뜨어 원전을 보면 사상(四相)이 곧 '고정불변하는 실체'를 전제로 브라만교, 자이나교, 독자부 등 일부 소승 부파들에서 주장한 개념들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도와 사상적 지형, 사고관이 다르고 산스끄리뜨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중국에서는 한역된 용어를 바탕으로 사상에 다소 변용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http://naver.me/Gd6eejHS|현진,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 반야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토끼의 뿔'과 같은 허구의 망상(妄想)이고 근본 번뇌인 아집(我執)의 소산이다. 이러한 개념적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의 무아, 공성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기법(緣起法)을 통해 일체법이 무자성(無自性)임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공성을 파악해야 한다. 또한 "영원하고 항구적이다"는 표현 역시 힌두의 아뜨만을 묘사할 때 쓰이기도 하고 열반 같은 무위법[* 불교 학파에 따라 열반 뿐 아니라 연기법, 공성같은 이법(理法)도 무위법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불성ㆍ여래장, 유식이나 중관에서의 진여, 공성 등 불교의 궁극적 진리, 이법(理法)을 묘사할 때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단지 특정 표현과 문구만으로 의미를 파악해서는 안되며 표현이 쓰인 전체 맥락을 고려하여 내포된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사유해야 한다. 일체법의 무자성(無自性)을 논하는 현교의 귀류논증 중관과 밀교는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닝마ㆍ사캬ㆍ까규ㆍ겔룩 등 티베트 불교 4대 종파들은 모두 귀류논증 중관을 종지(宗旨)로 삼아 불교 4대 학파(유부, 경량부, 유식, 중관)의 견해를 아우르는 매우 정교하고 방대한 교학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일찍이 현밀겸수(顯密兼修) 체계가 확립된 인도-티베트 불교 전승의 밀교 문헌들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술한 현교 교학 및 밀교 경전의 주석서들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밀라레빠처럼 현교 교학에 정통하지 않아도 밀교 수행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일 밀교 수행을 제대로 성취했다면 밀교 수행을 통해 얻은 견해와 현교의 견해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조화를 이룰 것이다. 전통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사라하, 나가르주나, 마이뜨리빠, 나로빠, 마르빠, 밀라레빠 등 초기 마하무드라 전승의 스승들을 귀류논증 중관학파로 분류한다.][* 티베트 불교 안에서도 교학과 수행에 비중을 두는 정도가 각기 다른데, 가령 겔룩이나 사캬의 경우 논리적 분석을 통한 공성 증득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반면 닝마나 까규는 직관적 경험을 통한 공성 증득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편이다(그러나 동아시아의 선종과 교종처럼 종파색이 극명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티베트의 모든 종파는 교학과 수행, 문사수聞思修, 현교와 밀교를 종합적으로 병행하는 수행체계를 갖고 있다). 또한 같은 종파라 할지라도 강원에서 체계적으로 교학을 익힌 승려와 그렇지 않은 승려 간에 차이가 있고, 밀교 수행자의 경우에도 반드시 모든 밀교 수행자들이 밀교 문헌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본 문단은 한국 불교와 인도-티베트 불교 내 족첸, 마하무드라, 중관 전승 간의 공통점을 위주로 간략히 서술되었다. 때문에 각각의 견해들을 상세히 설명하는 글은 아니다. 국내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티베트 밀교 문헌들에 대한 몇몇 오해를 불식시키고 중관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더불어 한-티 불교간 사상적 교섭의 가능성을 언급하고자 작성된 글임을 밝힌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귀류논증 중관이란 공통된 토대 위에서 무아, 공성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